◎ 동화사의 유래
* 동화사는 봉우리마다 부처님의 미소와 법음이 가득하고 옛 신라의 화랑정신과 통일의 정기가 어린 민족의 영산이며 오악의
중심이었던 팔공산에 봉황의 기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493년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부르다가 832년(신라흥덕왕7년)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하여 동화사(桐華寺)라 불리게 되었다. 모악산 진표율사로부터 속리산 법주사의 영심대사로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대사가 받은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 서거정이 노래한 대구 10경중 한 곳(동사심승)으로 그 동안 8번의 중창을 거듭하였으며,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 지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영산전, 봉서루 등이 있고, 중창 당시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의 3대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26교구
본사 가운데 대구광역시와 경북의 청도. 고령. 성주. 칠곡군 내의 사찰을 관장하고 있는 제 9교구 본사이다. 부속암자로는 비로암.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약수암. 염불암과 금당선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11점의 보물(대웅전,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삼층석탑, 당간지주, 도학동 석조부도 등)과 대구시에서 지정한 5점의 문화재(극락전, 수마재전 부도군 부도 등)등이 있다.
봉서루에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에 영남승군사령부를 두어 승군을 조련, 지휘하던 곳인 영남치영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 동화사 보물 바로가기 http://blog.daum.net/egoist_j/234
* 팔공산은 관봉갓바위석조여래좌상, 동봉, 서봉 등 마애약사불이 많이 보전되어 있어 약사신앙이 성행했음을 알수 있다.
또한 1992년 완공된 높이 약 33m의 통일약사여래대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동사리함 등을 복장하였으며, 국민안녕과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아 조성되어 약사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동화사 문화재 바로가기 http://blog.daum.net/egoist_j/240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35
▲ 통일약사여래대불
1992년 11월에 완공된 통일대불은 약사여래불로 높이 약33m. 둘레 16.5m이다.
석불의 몸체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고, 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를 세웠고, 대불 앞에는 통일대전을 건립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한 발원을 모았다.
▲ 봉서루
대웅전이 있는 경내에 오를 때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이 봉서루이다.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으로 오동꽃이라는 동화사의 절이름과
짝을 이루고 있다. 봉서루는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 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둥근 돌은 봉화의 알을 상징한다.
▲ 봉황알의 유래
봉황의 정기가 서려져 있다는 의미의 봉서루 앞 바위 위에 올려놓은 3개의 작은 돌을 봉황알이라고 부릅니다.
동화사 터가 풍수상 봉소포란형(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의 지세이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대사가 절을충창할때 오동나무꽃이
한겨울에 상서롭게 피웠다 하여 동화사로 불리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며 오동나무에 깃들고, 먹는 것은
대나무 열매만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절터주변에 오동나무가 대웅전 뒤편에 대나무가 많은 것은 스님들의 훌륭한 환경비보책의
하나이면서 봉황과 관련이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잇습니다.
※ 봉황알을 만지시면 소원성취하십니다.
원음각
설법전
▲ 대웅전
보물 제1563호
동화사 대웅전은 팔공산을 대표하는 정면 3칸, 측면3칸의 웅대한 건물로 조선 영조때에 지어졌다.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자연미를 살렸으며, 내부에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고개를 숙여 글을 읽는 듯한 이 불상들은 조선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며 진경산수화풍의 탱화,
천장을 장식하는 봉황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 조사전
대웅전 좌측 후원에 조사전은 동화사에 주석했던 역대 고승들의 진영을 모셔둔 곳이다.
조사전에는 창건주로 알려진 극달 스님과 보조 스님, 사명 스님,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그리고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당우의 규모는 작지만 단아한 멋을 풍기는 18세기 건물이다.
법화당
화엄당
산신각
극락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창건 연대는 알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2년(숙종 28)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의 불단 위에는 중앙에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앉히고,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서 있는 모습으로 모셨다.
불상위에는 대웅전처럼 머리 위쪽 천장을 장식하지 않고 대신 위쪽의 천장 높이와 모습을 서로 다르게 하여 부처님의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건물 아래의 기단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양식이다. 빗물과 습기를 피하고 건물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바닥돌을 쌓고 그 위로 차례로 돌기둥. 넓적하게 깍은 돌과 건물을 고이는 돌로 마무리하여 기단을 쌓은것을 말한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의 팔각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양식으로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하는 공포가 기둥위와
그 사이에도 있는 것을 말한다.
극락전 전체의 분위기는 화려하거나 번잡스럽지도 않고, 강직하면서도 단아하여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통일대전
통일약사여래대불
인악대사나무
인악대사의 속성은 성산이씨이며, 법명은 의소, 이름은 의첨으로서 영조22년(1746)지금의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때부터 신동이라 불리워졌으며,인근에 있는 용연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님이 되었다.
스승인 벽봉스님으로부터 금강경,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배워 비슬산, 황악산 등에서 불경을 설파하다가 동화사에 머물렀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용주사를 주관하는데 뽑혔으며, 불복장원문경찬소, 용주사제신장문이라는
글을 지어 바치니 정조가 크게 감탄하여 그에게 홍제라는 호를 내렸으며, 1796년 용연사 명적암에서
세수51세, 법랍34세로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엄사기, 금강사기, 기신론사기, 인악집 등을 남겼다.
수령이 500년 정도 된 이 느티나무는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스님을 기리기 위하여 "인악대사나무"라 이름지었다.
인악대사비
큰절과 금당선원이 갈리는 길머리, 이낙당이라는 편액을 붙인 허름한 비각안에 이낙스님의 일생을 적은비가 있다.
이 비는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화으로 조각한 것이 다른 다른 비석들과는 대별된다.
이것은 동화사가 봉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김희순이 짓고 글씨더 썼는데
왕희지풍의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봉황문
마애불좌상
보물 243호
* 일주문 앞 벼랑 위에 있는 이 불상은 부드럽고 인자하게 미소짓고 있으며 대좌를 두껍게 감싸면서
생동감을 불어 넣는 구름조각이 섬세하기 그지없다. 통일 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심지스님이
손수 정을 들고 새겼다는 말이 전하는 마애불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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